매년 초여름, 개최될때마다 일본 전국민은 물론 해외의 팬들까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아이돌 AKB48의 멤버인기투표라고 할 수 있는 'AKB48 선발총선거'. 한번 개최될때마다 발생하는 경제효과는 한국돈으로 2000~3000억원에 이르고, 개표결과 발표는 중의원선거와 동일하게 지상파로 생중계되며, 시청률은 20%에 육박한다. 아마 이렇게까지 아이돌그룹의 행사가 성대하게 치뤄지는 경우는 선발총선거 이외에는 없을것이다. 과연 이 '선발총선거'라는 행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제부터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006년 2월 1일 AKB48은 인디즈 싱글 1집 '桜の花びらたち(벚꽃의 꽃잎들)'를 발매한다. 지금은 멤버수가 수백명에 이르지만 이 당시 AKB48의 초기 멤버는 20명이었다.(이것도 다른 그룹과 비교했을때 많은편이긴 하다.) 그리고 인디즈 1집 桜の花びらたち에서는 모든 멤버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그리고 2006년 4월 1일, 2기생 19명이 새로 그룹에 들어온다. 이제 그룹의 모든 멤버가 같은 곡의 제작에 참여한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본래 운영진의 계획은 인기투표를 통해 멤버들을 1군(軍)과 2군으로 나눠 1군 멤버들이 음반제작에 참가함과 동시에 미디어에 노출되고, 2군 멤버들은 언더(under)로서 인기투표에 따라 1군의 멤버와 교체되는 포지션을 맡는것이었다. 그러나 운영진은 2기생이 가입하기 직전인 2006년 3월 28일, 팀(team)제도의 도입을 발표한다. 20명의 1기생이 team A, 19명의 2기생이 Team B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Team A와 Team B가 경쟁하는 초기체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음반제작에 참여하는 '선발멤버'들은 '운영진의 임의'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그 상태로 몇년이 흐르다 보니 당시 졸업한 멤버들을 합쳐 200명이 훌쩍 넘어가는 멤버들중에 선발로 발탁된적이 있는 멤버는 50여명에 불과했고, 심지어 10명(마에다 아츠코, 오오시마 유코, 타카하시 미나미, 코지마 하루나, 이타노 토모미, 미야자와 사에, 와타나베 마유, 키타하라 리에, 미야자키 미호, 마츠이 쥬리나)의 멤버들은 당시 첫 선발발탁후 한번도 선발에서 떨어진적이 없었기에 '선발고정'이라고 불렸다.
또한 본래 모든 멤버들이 AKS(AKB48의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당시 AKS는 아이돌을 키워본 경험이 없는 신생기업이었으므로 멤버관리가 미숙했다. 그랬기 때문에 AKS는 AKB48 멤버들을 경험이 풍부한 다른 기획사들로 이적시킨다. 당연히 다른 대형기획사로 이적된 멤버들의 인기는 올라갔고, 활동도 원활해졌다. 하지만 대형기획사에 소속된 멤버들과 그렇지 못한 멤버들 사이의 인기에는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대형기획사에 소속된 멤버들만이 주로 선발로 발탁되게 되자 비인기 멤버들의 팬들은 '대형 기획사의 압력이 있는거 아니냐'며 항의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소문들이 세간에 떠돌기 시작했다.
결국 선발멤버의 고착화와 그로 인한 비인기멤버, 신규멤버에게 돌아가지 않는 기회, 선발발탁에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일부 인기멤버들이 건성으로 활동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 것, 선발멤버의 구성기준에 대한 팬들의 불신 등 수많은 악영향이 속출하자 결국 운영진은 2009년 4월 콘서트(神公演予定)에서 2009년 8월에 발매되는 싱글의 선발구성은 인기투표를 실시하여 그 인기투표의 순위대로 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2009년 8월에 발매된 싱글의 선발구성을 결정하는 인기투표가 바로 1회 선발총선거였는데 사실상 1군/2군체계와 유사한 시스템으로서 '원점회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선발총선거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초여름에 실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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